근래 교육실습 중이다. 등교길에 담당 학급의 학생을 만났다. 아는 척을 하려고 다가서는데, 아뿔싸. 차분한 눈매가 돋보이는 그 학생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학생의 왼쪽 가슴을 살폈다. 그런데,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항상 차고 다니던 명찰이! 불편했다. 학생을 호명해야 할 때, 아둔한 내 머리는 버퍼링에 걸려 버벅댔다. 지나가는 학생이 몇 학년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학생을 통제하는 입장에 섰을 때, 비로소 나는 명찰이 얼마나 효과적인 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불편을 느낀만큼 학생의 권리가 보장되었다. 학생의 이름이 불특정다수에게 노출될 일이 없었다. 비록 상대가 교원일지라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름이 밝혀지는 일이 없었다. 통제는 조금 더 불편해졌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책임자는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책임에 필요한 힘을 인준받는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책임과 압제는 종종 잘 구별되지 않는다. 혹은 구별되지 않는 척을 한다. (통제가 쉬워지는) 기술의 발전 속에서, 책임자는 대상의 권리와 공동체의 공익 간의 문제를 합리적인 절차를 따라 충분히 고려하고 근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책임자들은 이러한 고민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려 퇴보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찰 사건 얘기다. 민간인들마저 마구잡이로 사찰당하는 현실에서, 공무원의 의무와 사생활에 대한 세밀한 논의는 기대하기 힘들다. 우리 사회의 책임자들은, 국가를 집권하는 정부의 이익에 맞춰 운영하려고 했다. 공적 기관의 책임자들을 정하는 잣대를 ‘친정부’로 정했다는 건 MB 정부가 국가를 마치 기업처럼 운영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민간인마저 ‘반정부’로 보이면 사찰했다는 것 역시 과거 독재정부의 방식을 기업식으로 따라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물론 지난 대선에서 후보 이명박이 높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또한 ‘기업식 운영’에 대한 기대감 아니었는지 다시 톺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꼼꼼히 챙기고 열심히 일하는 CEO출신이란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고, 당선 뒤에도 실제로 매우 열심히 일했다. 물론 지지자들은 그가 어떤 ‘대의’를 위해 그렇게 일하기를 기대했겠지만, 정부는 정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일했던 것이다. 정치와 국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철학을 내보인 적이 없는 인물, 즉 ‘비정치적 인물’들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오르내리는 지금 우리는 또다른 사찰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금번 사찰 사건은 아직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문건 중에 얼마나 민간인 불법 사찰이 섞여 있는지를 조사해야 하고, 참여정부와 MB정부의 것을 구분해야 하며, 공무원에 대한 사찰 중에서도 과도한 선을 넘은 경우가 없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사찰이란 민감한 영역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이, 민간인들에게마저 명찰을 붙이고 압제하려는 한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건 확실해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대선 후보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는 점도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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